숫자 너머의 삶을 기억한다는 것…일본 원수폭금지대회 참가기

기고탈핵신문

  • 입력 2026.08.1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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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은서 청년한의사회 학생회원

원폭 투하 81년을 맞은 올해 8월 4일부터 6일까지,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민의련)의 초청으로 보건의료단체연합과 함께 히로시마에서 열린 원수폭금지대회에 참가했다. 나는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학생회원으로 이번 일정에 함께했다. 원수폭금지대회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매년 8월 초 열리는 행사로, 피폭자와 시민, 의료인과 연구자 등 여러 사람이 모여 핵무기와 전쟁의 피해를 알리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자리다. 며칠간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원폭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들을 둘러보면서, 그동안 역사적 사건으로만 알고 있던 원폭 피해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히로시마를 방문하기 전까지 원폭은 내게 주로 역사적 사실로 존재했다. 그 참혹함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80여 년이라는 시간과 국경 너머의 사건이라는 거리는 그 비극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기 어렵게 했다. 더욱이 한국인에게 당시의 역사는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8월 15일의 해방이라는 기억과 떼어놓기 어렵다. 원폭 피해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분리해서 바라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히로시마에 가기 전까지 나는 원폭을 주로 역사와 정치의 언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도착한 히로시마는 예상보다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지금의 모습만으로는 이곳이 한때 폐허가 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떠올리기 어려웠다. 도시에서 찾기 어려웠던 과거의 흔적은 평화기념자료관 안에 남아 있었다. 원폭의 위력과 피해 규모를 설명하는 자료와 함께 당시 사람들이 입었던 옷과 사용했던 물건, 사진과 그림이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거대한 사건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상을 하나하나 기록해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도 한 벌의 교복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피폭으로 심한 화상을 입어 옷이 피부에 눌어붙었고, 부모가 이를 가위로 잘라내야 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결국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수만, 수십만이라는 숫자는 피해의 규모를 알려주지만, 그 안의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교복 앞에서는 달랐다. 그 옷을 입고 있었던 아이가 있었고, 다친 아이를 살리려 애쓰던 부모가 있었다. 자료관을 둘러보는 동안만큼은 원폭에 대해 무엇을 판단하거나 결론 내리기보다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보면서는 원폭 피해가 한국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히로시마에 머물던 많은 조선인 역시 원폭으로 목숨을 잃었다. 식민 지배와 원폭은 서로 다른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두 역사를 모두 몸으로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한국의 원폭 피해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합천이라는 지명이 나온 것이 뜻밖이었다. 내게 합천은 먼 역사 속 지명이 아니라 가까운 이웃 지역이다. 귀국 후 이번 방문에 관해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지인의 할아버지가 실제 피폭자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히로시마에 가기 전에는 내 주변에 피폭자의 가족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멀리 떨어진 과거의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예상보다 가까운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자신의 피폭 체험을 증언하는 원폭 피해 생존자 미토 에이코 님
자신의 피폭 체험을 증언하는 원폭 피해 생존자 미토 에이코 님

폐회총회에서 들은 한 피폭자의 증언은 원폭의 피해가 폭발과 함께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원폭 직후 상처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과 한여름에 부패하는 시신들을 모아 며칠 동안 화장해야 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고통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피폭 이후 아버지가 건강을 잃으면서 집안 형편은 어려워졌고, 그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해야 했다. 원폭은 한순간이었지만,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그 이후의 삶이 계속되었다.

피폭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그 피해가 이후 어떻게 기록되고 연구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일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일정 중 원폭상해조사위원회(ABCC)의 역사와 이후 이어진 방사선 영향 연구에 대해 들었는데,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특히 관심이 갔다. ABCC는 피폭자들을 장기간 추적하는 연구를 통해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지만, 조사 시기와 방법 등 여러 가지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 동시에 당시 ABCC가 피폭자들을 조사하면서도 치료보다 연구와 자료 수집을 우선했다는 비판이 존재했다. 점령기에는 원폭 피해와 방사선 후유증에 관한 연구와 정보의 공개가 통제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피폭자들의 몸과 삶이 있었다. 피폭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고통이 치료의 대상이기 전에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접하면서 연구가 무엇을 밝히는가뿐 아니라 누구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핵과 방사선처럼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한 영역에서 연구가 어느 한쪽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확인된 사실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구분하고, 새로운 근거가 쌓이면 그에 따라 기존의 판단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일수록 오히려 이러한 학문적 태도가 중요하다고 느꼈다.

히로시마를 다녀왔다고 해서 핵무기와 전쟁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에 명확한 답을 얻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그런 문제를 생각할 때 이전에는 없었던 장면들이 함께 떠오른다. 자료관에 남아 있던 한 벌의 교복과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그리고 자신의 삶을 들려주던 피폭자의 목소리다. 이전에는 역사와 정치라는 큰 틀에서 먼저 원폭을 바라봤다면, 이제는 그 안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삶을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숫자와 근거를 통해 사람을 이해한다. 그것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숫자와 근거 역시 결국 한 사람의 삶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히로시마에서의 경험도 내게는 비슷한 의미로 남았다. 거대한 역사적 흐름과 정치적 맥락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안에 있었던 개개인의 삶을 놓쳐서는 안 된다. 결국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사건의 규모와 의미를 아는 것뿐 아니라, 그 숫자 안에 있었던 한 사람의 삶을 함께 기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출처: https://www.nonukes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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