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아현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학생회원
지난 8월 7일부터 10일까지,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민의련)의 초청을 받아 보건의료단체연합 청년한의사회 소속으로 원수폭금지대회에 가게 되었다. 원수폭금지대회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된 매년 8월 초에 열리며, ‘핵 없는 세상, 평화로운 미래’, ‘No More Hiroshima, No more Nagasaki’ 등 반핵 반전의 메세지를 외치는 수많은 이들이 모이는 자리이다. 그곳에서 전쟁의 상흔과 평화를 향한 의지를 직접 보고 들으며 깊은 울림을 받았다. 책이나 뉴스 속에서만 접했던 역사와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그 무게는 결코 글이나 말로 다 옮길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전에는 나가사키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과격하게 말하는 일부 사람들의 ‘핵을 맞을 만 해서 맞은 것이다’라는 발언에도 이전에는 ‘너무 심하지 않나?’ 정도로만 생각했지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것은 알았지만, 며칠 뒤 나가사키에 한 발이 더 투하되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대회 참가를 준비하는 사전 모임에서 원폭 피해자들이 다른 누가 아니라 평범하게 일하던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는 한국에 강제징용당한 노동자들 또한 많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대회 기간 동안 다양한 강연이 이어졌는데, 특히 피폭자들의 증언이 마음을 울렸다.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몸과 삶 속에 남아 있는 상처를 담담히 전하는 목소리는, 핵무기가 인간에게 남기는 흔적이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일깨워주었다.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발표는 또 다른 시사점을 던졌다. 냉전 이후에도 핵무기는 여전히 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존재한다. 점점 서로를 적대하게 되는 국제 정치 속에서 언제든 다시 사용될 수 있는 위험이 잠재해 있다. 가치중립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연구자들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에 대한 반대 의견을 밝힌 것이 놀랍기도 했다.
무엇보다 피폭자들이 큰 용기를 내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떠올리기조차 힘든 경험들을 계속해서 증언하는 것이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피폭 생존자 오오츠카 씨는 ‘피카노코’라고 조롱당한 아픈 경험을 이야기하면서도, “일본 때문에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에게 미안하다”라고 우리 한국인 참가단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실제로 사과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진심이 먹먹하게 전해져왔다.
나가사키의 피폭지를 직접 찾은 시간은 강연 이상의 충격을 안겨주었다. 폭심지 공원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1945년 8월 그날의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한순간에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던 자리에는, 훗날 평화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기에 비극의 흔적이 스며 있는 듯했다.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아이들의 벽화는 원폭의 아픔을 담고 있었고, 공원의 추모비 하나하나에서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희생자들의 무게가 느껴졌다. 커다랗게 남아 있는 천주교 성당의 탑 잔해에 원폭의 참혹함을 실감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정으로 나가사키 인권평화자료관에 가서는 적잖이 놀랐다. 사설로 운영되는 3층 건물 안에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가 가감 없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일본이 전범국으로서의 과거를 숨기거나 축소한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그곳에 전시된 자료는 너무 사실적이고 잔인해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마음이 무너질 정도였다.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피해자 정체성만 강조하는 사회 가운데서도, 결국 누군가는 진실을 전하기 위해 묵묵히 애쓰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고 감동을 받기도 했다. 어디에서나 결국 노력하는 사람들은 존재하며, 바로 그 노력이 역사를 잊지 않게 하고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도록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번 나가사키 방문은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핵무기가 여전히 존재하는 세계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평화는 거창한 구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실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대회에서 만난 세계 각국의 참가자들은 언어와 배경은 달랐지만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있었다. 그들의 진지한 눈빛 속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목소리라도 모이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나가사키는 분명 고통의 도시였지만, 동시에 평화와 희망의 도시이기도 했다. 피폭의 상처를 기억하면서도 그것을 평화 운동의 힘으로 전환하는 나가사키 시민들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핵 없는 세상을 향한 발걸음은 멀고도 험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길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다.
나는 이번 경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강연장에서 들었던 목소리, 폭심지에서 느꼈던 침묵, 인권평화자료관에서 마주한 전시 하나하나가 마음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앞으로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계속해서 묻고 또 일깨울 것이다. 어디서든 노력할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력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렇게 희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은 너무도 쉽게 묻히고 잊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냉소주의와 혐오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널리 알려야 한다. 나가사키가 전해 준 교훈을 바탕으로, 일상 속에서 평화의 가치를 지키고 전하는 작은 실천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것이 이번 대회에 참가한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가 져야 할 책임이라고 믿는다.
출처 : 탈핵신문(http://www.nonukesnews.kr)
https://www.nonukes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1458 (기사 원문)